제 1장. 도원결의
뜬금없이 찬호랑이님이 나에게 찾아왔다.
"해커톤 하실래요?"
나는 평소 누굴 찾아가서 얘기하고 일을 벌리는 성격이 아니지만, 들어오면 거의 콜 하는 편이다.
"그렇다면... 다날에는 3대 황금함대가 있는데요,
그 이름은 "성수, 찬미, 상민" 입니다...! 그들과 함께라면 우승각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분들을 등용하세요!"
ㅋㅋㅋ 말해놓고 보니 찬호=유비, 나=제갈공명 느낌이 들었다. (실상은 제길공명임)
다행히 셋다 승낙했으나, 뒤늦게 알게된 인원제한(4인)과 어찌저찌 흐지부지되서 땅미니는 참여하지 않게 됐다.
제 2장. 주제선정의 난(亂)
3가지 주제 (서울의 인프라 활용, 금융 문해력 향상, 환경보호) 중, 우리는 pg사 출신이기 때문에 금융을 주제로 택했다.
연차가 쌓일수록 개발자로써 자존감이 낮아진 나는,
아이디어, 기획, 발표 등 내가 잘하는 분야로 최대한 공을 쌓으려 노력했다.
목표금액을 가시적인 아이템으로 선정하고, 저축을 장려하자!
(2000만원 = 아반떼, 2만원 저축하면 0.001 아반떼를 저축했어요!)
그리고 목표에 가까운 사람 순으로 랭킹을 매기고, 등등...
찬미님도 폭넓게 이것저것 써본 사람이라, 유사한 서비스를 얘기하며 많은 참고 아이디어를 보탰다.
그리고 당연히 금융 서비스의 꽃은... 마이데이터... 실시간 데이터 연동도 필요해보였다.
찬호님이 열정적으로 피그마를 펼쳐 정리했다.
모름지기 아이디어 회의에서 중요한 것은, 아이디어가 나무처럼 수많은 가지를 뻗치는게 아니라,
대나무처럼 뻗고, 마디를 맺고, 다시 뻗고 마디를 맺는 것이다.
아슬아슬하지만 잘 빌드업 되고 있는 것 같은 탑을 성수님은 한번씩 뒤집어 엎었다.
"너무 일적으로 상업적으로 접근하니까 재미가 없어요"
"해커톤 본연의 의미에 따라서 우리가 하고 싶은걸 해요"
맞는 말이지만 마땅한 대안이 없어서 계속 아이디어를 내고, 목업을 만들어보고 하던 중,
우매한 내가 대-성수님의 큰 뜻을 헤아릴 수 있었던 순간이 있었다.
"실시간 데이터 연동이 기술적으로 구현하기도 힘들고 안정성도 떨어져요.
대신 우리 과거의 데이터를 활용합시다. 사람들에게 과거 데이터에 관련된 퀴즈를 주는거에요.
IMF 사태 때 너는 어떤 투자를 할것인지 그런 퀴즈요."
처음엔 이게 무슨 뜻인가? 이해를 못하다가,
아, 과거의 경제위기 상황을 재현해서 모의 투자를 하자는 뜻이구나!
이렇게 되면 기술적 구현도 쉽고, 안정성도 팍 올라가며, 주제 "금융 문해력 향상"에도 정확히 들어맞는다.
참뜻을 깨우치고 나는 기독교 신자이지만 극락왕생할 뻔한 경험을 했다.
"좋아요. 대신 금융관련 퀴즈를 내는건 토스랑 똑같으니, 형태가 완전히 달라야해요.
우리 3D로 만듧시다. 나의 목장이 있고, 목장 안에 캐릭터를 수집하는거에요.
그래서 숨겨진 이벤트를 달성하면 캐릭터가 추가되는 수집형 RPG 로 만듭시다"
찬호님도 눈이 반짝이며 거들었다 "서머너즈워 처럼요?" (찬호님과 내가 함께하는 3d 수집형 rpg 게임)
그래서 머니지먼트 초기버전의 틀이 잡혔고, 그 방향으로 만들자고 결판이 났다.
제 3장. 동상이몽, 사분오열
해커톤 본래의 의미는 하루 24시간 안에 서비스 한개를 완성하는 것이다.
사실 그래서 일정에 부담이 없을거라 생각해 나는 이것저것 많은 일정을 미리 잡아놓은 상태였다.
막상 해커톤 준비를 시작하니, 모든 팀원들이 공부, 자료조사, 개발 등
이미 프로젝트에 많은 공수를 들이고 있었다.
3대 황금함대인 찬미 성수는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눈에 띄게 진척을 냈다.
백엔드 api 는 찬미의 손 아래 구색을 거의 갖췄고,
프론트엔드는 대-성수의 마법으로 작동가능한 초기버전이 빠르게 나왔다.
찬호대리님도 한사랑 산악회급 열정으로 공부하고, 개발하고, 정리했다.
백엔드 찬찬 커플은 원활하게 소통하며 백엔드를 만들어 나간 것에 비해,
성수대리님은 또 연락이 아주 잘되는 편은 아니었고, 나도 바쁜사람 미안해서 괴롭히지 못하는 성격이라
프론트엔드는 소통이 거의 되지 않았다.
나는 프론트엔드 측에 속하게 됐는데, 정말 놀지 않았지만 시간 투자가 힘들었다.
나의 사정을 배려한 팀원들은 나에게 많은 일거리를 주지 않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난 완벽하게 소화하진 못했다.
결국 해커톤 전일? 전전일? 새벽 3시쯤이었나, 다들 정신이 반쯤 나가있을 때
찬호님이 서운함을 표시했다. 너무 참여하지 않으시는 것 아니냐고.
사실 할 말이 죄송하다는 말 밖에 없긴 했다. 그 말이 맞으니까.
뭔가 계속하긴 했다. 전국노래자랑 전 보컬 트레이닝, 디제잉 수업도 받고 행사도 뛰러 가고...
끝나고 와서 자정 쯤에 컴퓨터 앞에 앉으면, 성수대리님이 짜놓은 코드를 읽고,
three.js 가 뭔가... 이 클래스는 무슨 역할인가... 읽고 이것저것 수정하려고 만지면 작동이 안되고
만들어낸 결과물은 딱히 없이 컴퓨터를 끄게 됐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내가 충분히 일정을 빼놓았어야 했다.
대-성수님이 와중에 또...
"원래 해커톤이 24시간 안에 완성하는거니까 당일날 잘하면 되죠. 그게 본연의 의미니까"
"괜찮아요 우리 이런거로 감정적으로 가지 맙시다"
젠장 이러면 그를 찬양할 수 밖에 없잖아! 이성과 감성을 모두 갖춘 문무겸비의 인재라니...
가히 그는 난세의 다날을 통일할 천하의...(대충 찬양하는 글)
잘못은 잘못이나 무기력하거나 자괴감으로 빠지면 퍼포먼스가 떨어진다.
난 멘탈을 꽉 잡고, 앞으로의 퍼포먼스와 작업으로 충분히 빛을 발할 수 있다고 스스로 되뇌이며
마지막 밤의 끝을 붙들다 나도 모른새 잠들었다.
제 4장. 젤핵대전
어느새 결전의 날, 해커톤 당일이 됐다.
이른아침에 북콘서트 일정으로 난 살짝 늦게 참여했는데, 한창 아이스브레이킹이 진행중이었다.
아무래도 해커톤이 우리처럼 팀을 꾸려온 사람들도 있겠지만, 혼자온 사람들이 팀원을 찾는 경우도 있으니,
서로의 공통 관심사들을 찾으며 인사하는 시간을 가졌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린 계속 우리 길을 가야지. 쿠팡 임원이 와서 강의를 해도, AI 관련 강의를 해도, 우린 우리 길을 갔다. (AI관련 강의를 하러 오신 분은 나이가 대충 60대쯤 되어보이는 할아버지셨는데, 거의 모든 사람이 자기 노트북만 보면서 코딩을 자꾸 하니 마지막에 거의 "제발 내 말 좀 들어주세요 ㅠㅠ" 하면서 무리수를 두셨다... 마음이 아픈 부분이었다...)
알긴 알았지만, claude 는 정말 신이다. react + js 템플릿의 코드를 수정할 필요없이 바로 갖다 쓸 수 있도록 짜줬다.
협업&운영을 위한 프로젝트 구조화 같은건 못하긴 한다. 한페이지로 출력되니깐...
그래도 해커톤 같이 바로바로 가져다 쓸 수 있는 코드를 만드는 능력은 가히 발군이었다.
(채찍피티씨는 나사가 하나씩 빠져있기 마련... 가끔은 정말 채찍이 마렵다.)
그래서 claude 는 명령 한방에 퀴즈를 표시하는 팝업창을 만들어줬고,
몇마디 더 하니 1900년대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경제위기 사건과 그의 대한 설명,
그리고 설명을 나눠서 페이징해서 표시, 설명 중 경제 용어에 대한 설명 팝업,
슬라이드 바로 퍼센티지를 표시하여 현재 돈에 대한 투자 금액 설정,
경제 위기 상황을 반영한 투자옵션별 수익률, 그리고 투자금액을 수익률에 따라 변경해서 반영하는 기능까지
전부 다 만들어줬다. 불과 한시간이 채 안걸렸다.
빠르게 가시적인 결과물이 나오자 팀원들도 사기가 증진됐고, 나도 나의 과오를 약간은 청산한 것 같아 마음이 한결 나았다.
점심 식사가 꽤나 괜찮게 나오고, 쿠팡 11층 이었나 건물에서 시티뷰를 보며 식사를 했다. 3리터 정도 되어보이는 배달 스벅 아메리카노 디스펜서로 커피를 무제한 마실 수 있었다.
멘토링 시간이 되어 우리는 멘토님을 찾아갔고, 우리 아이디어를 찬호님이 열정가득한 초롱초롱 눈빛으로 얘기했다.
멘토의 촌철살인, "그래서 그게 한마디로 하면 뭐에요?" 했을 때 우린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나는 완성본이 내 머릿속에 나름 있었기 때문에 결국 "수집형 RPG 게임, 근데 이제 금융 퀴즈를 곁들인" 이라는 방향성을 잡고 계속 개발했다.
뭐했다고 벌써 저녁시간이다.
쿠팡의 식사공간은... 큼직하고 광활하며 남향의 통유리 창문에서 한-껏 햇빛이 내리쬐었다.
다날식당도 정말 좋지만... 역시 남의 떡이 더 커보이는 건 어쩔 수 없는 건가.
아니지. 남의 떡이 실제로 훨씬 크긴 하지...
밥먹고 다시코딩 레스고
11시쯤 됐을까, 슬슬 한계점이 다다르기 시작했다.
슬슬 능률이 떨어지고, 키보드에 손이 느리게 움직인다.
열정적으로 으쌰으쌰 삽질했던 도원결의 4인방은
우쒸우쒸 왜 안됨 ㅂㄷㅂㄷ 을 시전했고,
1시를 넘어가서부턴
어느새 무르익은 벼마냥 간신히 고개를 버티고 일하고 있었다.
새벽 3시.
찬호님은 패시브 "장교의 의지" 로 계속 버텼고,
성수님은 외지주 속 "무의식"을 시전하며 코딩을 멈추지 않았다. (사실 신성수는 렙틸리언 혹은 안드로이드가 아닐까..)
찬미는 파업 선언 직전의 상태였다.
나도 밤 새우는 것은 자신이 없기도 하고... 발표 질의응답에 순발력이 나오려면 최소한의 잠은 자야한다 생각했기에...
(좀비 상태로 무대에 서서는 우리 프로젝트를 팔수가 없겠다..!) 4시쯤인가부터 3시간 정도 잤던것 같다.
쿠팡 식당 장의자에서의 잠은... 로켓수면인가... 정말 빨리 끝났다.
3분같은 3시간 잠을 자고, 마저 개발에 참여했다.
둘쨋날 아침 9시쯤부터 찬호님이랑 발표자료 만들고, 스크립트짜고... 정신차릴 틈 없이 계속 개발하다가, 11시에 제출 후, 한국 멘토들에게 심사를 받았다.
이제 부터 발표왕 승영이의 꿀팁을 알려드리겠다.
1번째로 마인드 세팅. 우리 상품이 최고라고 자부심을 진짜로 가져야한다. 진짜 머니지먼트 프로젝트는 최고다.
다른 프로젝트들은 다 고만고만했다. 실제로 난 그렇게 생각했지만 아니더라도 그렇게 스스로 세뇌해야한다.
그래야 내 제품이 어떤 점이 차별화 됐는지, 내가 내 제품이 왜 좋은지 자연스럽게 생각의 흐름에 따라 나온다. 그리고 그걸 사기치듯 전달하지 않고, 진심으로 이게 좋으니 너희에게 추천한다는 분위기가 연출된다.
2번째로 눈을 크게 뜨고 웃으며 크게 말한다. 눈과 눈이 마주칠때 전달되는 느낌은 고스란히 제품의 이미지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사람은 생각보다 멍청해서, 제품이 좋은건지 내 표정이 좋은건지 헷갈린다. 그리고 내가 100% 소리를 내면 듣는사람은 70%로 들린다. 그래서 130%로 얘기해야 사람들에게 100% 전달이 된다.
그러게 아리 마냥 멘토들을 전부 매혹하겠다 다짐하고 피티를 했다.
예상외로 카페식탁에서 노트북 화면으로 전달하는 초-소규모 발표는 살짝 날 당황하게 했으나, 모든 것은 계획대로 진행했다.
근데 이 "예심" 절차는 정말 구현이 안되거나 처참한 프로젝트를 걸러내기 위한 작업이었고, 그 뒤에 영어로 CEO나 임원들에게 발표하는 순서가 찐이었다.
냅다 "예선을 통과한 금융부문의 팀을 발표하겠습니다."
5개 팀 호명.
"1번째로, xx팀은 나와서 영어로 발표하세요!"
개당황...
우리는 뭐가 어쩌고 준비할 시간없이 2번째로 발표를 해야했다.
근데 여기서 내가 당황하면, 우리팀 당황, 심사위원 당황, 관객 당황.
당황의 흐름은 내가 쥐고 있었다.
ㅇㅋ 다 패고 온다 의 각오로 올라갔다.
"Why So Serious?"
이번 발표의 주제로 내가 잡은 키워드다. 물론 조커 에서 따왔고, 조커 짤도 발표에 넣었다.
수많은 프로젝트를 듣은 심사위원은 어차피 우리에 대한 인상은 길어야 한마디의 말로 기억된다.
아예 뇌리에 한단어로 박아줘야 우리가 쉽게 기억된다.
기존 금융관련 서비스가 MZ들에게 인기가 없고 금융 문해력을 증진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너무 Serious 하기 때문. 그래서 Serious 하지 않은 방식으로 전달해야한다.
그래서 게임을 만들었다.
의 흐름으로 발표를 했고, 심사위원 백형이 꽤나 흡족스러워했다.
물론 랩틸리언 성수의 과거 경제위기 시뮬레이션 아이디어가 근본적으로 차별점이기도 했다.
다른 팀은 진짜 고만고만했다. 한팀은 그냥 토스에 경제퀴즈 구현했고, 한팀은 약간 참신하긴 했는데, 유튜브 쇼츠 중에 경제관련 쇼츠만 퍼와서 경제상식과 함께 쇼츠로 관련지식을 배울 수 있는 앱을 개발했지만,,,
ㅋ 우리가 이김 ㅋ
결과는 모두 알겠지만 우린 승리했다.
후기
사실 난 개발자로써 자존감이 매우매우 낮았다.
같은 BE플랫폼개발팀의 팀원들이 너무 우수하고 성실하며, 난 그러지 못했고,
신입부터 오랜기간 운영팀에 있으며 쌓인 물경력으로 인해 쭈구리 개발자 생활을 했었다.
해커톤은 내 개발자 인생의 터닝포인트다.
나도 할 수 있구나, 나도 개발자구나 라는 생각을 확실히 느끼게 해줬다.
전국노래자랑과 겹경사로 터진 해커톤 수상 경험은, 나의 생각의 크기를 훨씬 키워줬다.
나의 크기는 곧 내 생각의 크기다.
PS
싱가폴 가서도 다 패고 오겠습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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